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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땅 사람 먹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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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 홍어장시 다홍색 내기는 일도 아녀."
제목 "영산포 홍어장시 다홍색 내기는 일도 아녀."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10-03-05
  • 추천 0 추천 하기
  • 조회수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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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포 홍어장시 다홍색 내기는 일도 아녀”
나주 영산포장

김창헌 기자  

▲ 연탄불에 훈제. 장날이 잔칫날이다.
ⓒ 김창헌

“속장갑을 껴도 이 모냥으로 돼불었네.”
강양광(70) 할머니의 왼쪽 손바닥은 껍질이 다 벗겨졌다. 홍어와 살아온 세월이 그대로 배겨 있는 손바닥이다. 21살에 영산포로 시집 와 홍어만 썰어왔다. 지금도 잔칫날이면, 홍어집에서 부르면 일을 도와주고 ‘가용’에 보태 쓴다.
“홍애물이 독하잖애. 이 손으로 (홍어를) 잡고 썬게….”

나주 영산포장(5·10). 앉아 얘기 듣고 있으면 푹 삭힌, 알싸한 홍어 냄새가 퍼진다. 뱃고동 소리를 내며 홍어배가 들어오고 황실이배가 젓배가 물살을 가른다. 흥청망청. 북적북적. 선창가로 도부꾼들이 우르르 달라들고 등짐꾼들은 지게 그득 고기를 져 나른다.
가수 이미자는 ‘영산포 아가씨’를 노래했다. “갯바람 소금바람 비린내로 정든 고향. 영산포 내 사랑을 진정 못 잊겠네.”

 

▲ “나주 사람들은 홍어가 올라가야 잔치했다고 해.” 영산포장 홍어전문가 이영호씨
ⓒ 김창헌

“얼치기요? 똥개요?”
강아지 토끼 닭 병아리 칠면조 오리 거위….
“날 따뜻한게 개전 삥아리(병아리)전이 장 다 보네”라는 말이 나온다.
손님이 “얼마요” 물어보면, 장사는 “살라요? 폴(팔)라요?” 물어본다. 한 할머니는 집에 있는 개가 새끼 일곱 마리를 낳았다고 한다. “내놓기는 해야 쓴디…” 주저하는 것은 손주 녀석 때문이다. “한 마리도 넘(남) 주지 말고 폴지 마라고 지가 다 키운다고. 핵교서 오믄 고놈들하고만 놀고 있단게. 우유 믹(먹)이고. 아이고! 보도사도 못해.”
장사는 물어볼 것이 또 있다. “얼치기요? 똥개요?”
‘얼치기’는 ‘이것저것이 조금씩 섞인 것’이란 뜻으로 명견과 똥개를 교배시켜 낳은 개다. 얼치기가 더 크게 자라기 때문에 값이 나간다.

▲ 영산포장 중심은 어물전.
ⓒ 김창헌

▲ 숭어새끼 문절이. 부안사람이 가져왔다
ⓒ 김창헌

개금을 정하며 실랑이가 벌어졌다. 개전 할머니는 절대 지지 않는다. “2만 원만 빼 주라”는 소리에 “나는 더 주쇼, 덜 주쇼, 줄다리기 하는 것 싫어해. 일 원도 빼지 말고 갖고 가. 나는 물건은 물건답게 주고 값은 값만큼 받는 사람이여. 여러 말 하지 말어.”
그러나 장사가 어디 그런가. “그라믄 나도 못 갖고 가제” 하는 소리에 “아따, 이 양반∼. 오늘만 내가 ‘나무아미 관셈보살’ 하네. 운 좋구만. 내가 이러는 법이 생전 없는디….”
나무아미관셈보살? 양보한다는 것. 마음 헤아려 준다는 것. 보시한다는 것. 2만 원은 안 되고 1만 원을 빼 준다.

병아리전에서 병아리 열 마리를 상자에 담아 자전거에 실은 김정철(71) 할아버지는 친구에 끌려 나무전으로 간다.
“닭을 샀으믄 옻나무도 사야제. 이 사람이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네. 빠딱 생각나야제.” “아고∼, 저 옻나무 키워서 닭 잡아 묵을라믄 닭이 황새 돼 있겄네.” “이 사람이∼. 재미로 사고 그러는 거제. 그런 재미도 없이 시상(세상)을 살라고 한가.” 할아버지 반듯하고 좋은 놈으로 옻나무를 고른다.

▲ “하루종일 캐왔어.”
ⓒ 김창헌

심고 싶은 나무가 많다. “옛날집에 몇 십 년 된 살구가 있어 갖고 고놈 피믄 집이 궁궐이었는디 도로공사하믄서 뽑혀 불었어. 아깝단게.” 예전에는 마을에 꽃 피는 나무가 많았다. 방앗간집에는 자두나무 세 그루가 하얗게 예뻤다. 영암양반집에는 붉게, 가지 촘촘하게 꽃을 피우는 밥태기나무가 줄줄이 있었다. 그러나 주인장 없어지고 빈집으로 남다 보니 자두나무도 밥태기나무도 언제 죽어버렸는지 모르게 사라졌다.
할아버지가 옻나무와 함께 산 나무는 ‘흑감나무’. 처음 본 나무, 신기했다. “진짜로 감이 까맣다고? 시상 오래 살고 볼일이네.”

함평에서 온 나무장사에 따르면 흑감은 중국에서는 황제에게 진상되던 진귀 품종. 일반감처럼 퍼렇게 열려 노랗게 익어가다가 완전히 익을 때는 새까매진다. 씨가 없어 먹기 편하고 당도가 높은 과일. 3∼4년 지나면 흑감을 재배하는 농가가 생겨나 소비자들이 많이 찾는 과실이 될 거라고. “한 낭구(나무) 숨궈(심어) 갖고 돈 벌어라고….” “돈 벌어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맛있게 묵고 사람들한테 자랑하믄 좋지라.”
묘목이라 흑감 맛을 보려면 3년은 기다려야 한다. “이것 맛 보려믄 기어이 더 살아야겠구만. 그것 생각한게 징그럽네. 요것이 내 장수나무구만. 삥아리 사러 왔다가 헛돈이 막 들어가부네. 진짜 헛돈은 아직 쓰지도 못했는디….”
‘진짜 헛돈’은 술 한잔 걸치는 일. 자전거 끌고 국밥집으로 간다.

▲ “논두렁밥상 채려봐.”
ⓒ 김창헌

‘아줌마가 아가씨 돼분’메밀
작은 손수레 앞에 사람들이 몰려 있다. 노란 가루 한 봉지씩 사간다. 손수레 위에 세워진 푯말은 ‘뱃살이 쑥쑥 빠진다!’
“진짜 빠져요?” 물어보는 사람이 많다. 장사하는 아저씨 대답은 한결이다. “동의보감에 빠진다고 나왔어요. 허준 알지라. 테레비에 많이 나왔는디. 메밀로 아줌마가 아가씨 돼불었다고.”
메밀씨를 튀겨 놓은 것이다. 보리차처럼 끓여 먹는다는데 한 할머니가 알아 본다. “누룽지마냥 구수해. 옛날에 소화 안 되믄 묵고, 얘기들 소변 못 보믄 해 믹이고 그런 거여. 메밀이 오장육부에 좋아.” 할머니 한 주먹 집어 입안에 넣는다. 장사하는 아저씨 “한 주먹 더 하쇼.” 장사 도와주는 고마운 말이다.

나주장 영산포장 시종장 다시장을 도는 뻥튀기 장사 천영복(68)씨는 메밀 파는 장사가 약간 눈엣가시다. “내가 집어 묵어 봐도 고소하든마. 할매들 차 끓일 것도 없이 한 주먹썩 하믄서 시간 보내믄 좋겄어. 내 물건도 ‘심심풀이땅콩’인디, 중복이 된게 눈에 밟히제.”
천영복씨 명함에는 ‘뻥튀기 장사 21년’이라고 적혀 있다. 거짓말이다. “장사 11년째여. 장사하다본게 명함이 필요해. 전화번호 일일이 적어주고 그러믄 귀찮잔애 앞으로 10년만 더 할라고 그리 해놨어. 해 바뀔 때마다 새시로(새로) (명함을) 팔 수는 없잖애.”  

반남면 신촌리 성내마을 이복림(77) 할머니는 이 뻥튀기 가게 단골이다. 원래 군것질을 잘 하고, 큰딸 작은딸 아들집에 콩 볶아 보리 볶아 대주는 게 일이다. 단골집에 와서 반나절 앉았다 가는게 재미다. “여그 있으믄 다 만나잖아. 뻥 튀기믄, 바로 튀긴 놈 한 개씩 묵음시롱 얘기하믄 별 얘기가 다 나온게 재미져.” 단골로서 불만사항이 하나 있다. 뻥튀기 장사는 ‘뻥’ 하고 튀기기 전에 호루라기를 부는데 “너무 씨게(세게) 불어. ‘뻥’ 소리에는 안 낼래도 ‘삐∼’ 거리는 소리에 가슴이 철렁해.”

▲ ‘뻥튀기 장사 21년’ 명함의 천영복씨. “11년째여. 앞으로 10년 더 할라고.”
ⓒ 김창헌

“영산포는 한창이제. 나주에서 질로 큰장인디”
어물상 김경현(46)씨 가게가 가장 떠들썩하다. 연탄불에 훈제, 잔칫날이다. “2천 원어치 내놓으믄 4천 원어치 사가겄제” 하며 주인장은 기분을 막 낸다. 여기저기 서 모인 네 할머니는 “그거야 당신 생각이고…” 하며 “아들아! 안주 없다” 하며 술잔을 돌리고 돌린다.
‘주둥이로 망한다’는 꽁치 두 마리가 구워지더니, 주인장은 조기라 우기고 공짜로 먹는 할매들은 ‘부서’라 하는 ‘가짜 조기’가 올라오고, 몸통 두툼한 전어가 다음 차례고, 큼지막한 ‘썩어도 준치’가 두 토막이나 올려진다. 그제야 할머니들 “아들아 우리 땜시 장사 말아 묵겄다야.”
소주파, 맥주파로 나뉘어졌다. ‘임은 품어야 맛이고 술은 취해야 맛’이라고 “오늘은 노는 날”이라고 정해 놓고 작정하며 마신다. ‘묻지 마라 갑자생’이라는 할머니는 “달력 안 봤어. 오늘 ‘노는 날’이라고 (날짜가) 삘겋게 적혀 있어” 하고 어거지(억지)를 쓴다.

▲ “동의보감에 나왔어. 빠진다고.”
ⓒ 김창헌

오일장 얘기가 나온다. “장날이 촌놈들 생일인디, 생일 안 쇤 지 오래 돼 불었어. 촌에 사람이 있어야 잔치를 하든지 말든 하제.” “그래도 영산포는 한창이제. 나주에서 질로 큰장인디, 다 돼불었다고 하믄 욕 얻어묵어. 딴 장은 ‘뒷전 장사’ 한다고 해도 영산포는 아녀.”
영산포장은 2003년 영산동 포구에서 절고전 갯내를 벗고 이창동 택지지구로 옮겼다. ‘영산포 풍물시장’이라는 새 명패를 달고 200여 칸의 장옥이 현대식으로 단장됐다. 어물전을 중심에 두고 각 전이 에워싸고 있다. 그런 대로 어물전 분위기가 나는 것이 칸칸이 막히지 않고 시원스레 펼쳐져 있다. 어물들이 이어지며 구경하기 좋다. 가게마다 백열등을 밝혀 어물전 분위기를 거든다. 장 한가운데는 문화공연을 펼칠 수 있는 무대다. 영산포상인회는 각설이 타령, 판소리 공연 등을 기획해 난장을 펼치고 있다.

그러나 옛장에 대한 미련이 남아서인지 새로 지은 장의 평가는 엇갈린다. “장만 새로 지어놓믄 뭣해. 버스를 이짝으로 돌려줘야 하제. 늙은 할매들이 여까정 걸어서 오겄어. 남평 사람들은 버스가 없는게 못 온단게.”“눈비 오믄 사람 지나도 못 댕기고 여름에 파리 날리고 구장(舊場)에 비할 바가 아니제.” “터는 좁아도 구장이 사람 냄새 나고 좋았제. 좁다 해도 옴팍하게 죄이는 맛이 있었잖애. 나는 여기 오믄 휑해 갖고 맘이 허전해. 옛날로 돌아가고 자퍼(싶어).”
이창동으로 장터가 옮겨지고 개장식이 열렸던 첫 장날, 재미난 사건이 있었다. ‘빤스 장사’들이 노났다.

“새 장에서 빤스 사 입으믄 사업이 술술 풀리고 부부 금술 좋아진다고…. 빤스 장사들 없어서 못 폴았어. 막판에는 물건 동나 갖고 빤스 찾으러 댕기는 사람이 얼매나 많았는디…. 개장할 때 사람들 많았제. 사람들 끓어야 한다고 물건값 다 내려서 폴고 손님들 장사 잘 되라고 한 개 살 것 두 개 사주고.”

▲ “장 담글 때 이것 잊어묵으믄 안돼.”
ⓒ 김창헌

“고깃배 들오믄 ‘선창에 조기 황석어 받으러 간다’고 입소문이 나”
“봄 닥치믄, 물이 밀 때 흑산도 홍어배 들어왔제. 여름에는 썩은게 안 들어오고 봄 가을 겨울로 들어왔어. 병어도 봄에 들어오고 여름에 황석어배 갈치배 줄줄이 들오고. 꽁치 고등어 황실이 오고. 그 배들 깃대 펄럭임시롱 들오믄 선창이 흥청흥청 해.”
어물전에 앉아 오래 전 얘기 듣는다. 강양광 할머니, 영산포에서 태어나 홍어장사를 29년 동안 해오고 있는 삼화상회 이영호(54)씨, 최찬집(74) 할아버지 모두 그때로 돌아가 열변을 토한다. 그렇게 좋은 시절이 없었다.
“영산포로 올라온 고기가 강진, 해남, 광주 송전리, 곡성 담양으로 다 갔는게. 그때는 영산포 사람들이 가마니로 돈을 셌제.”
계절 따라 들어오는 고깃배들. 많을 때는 스무 척이 넘는 고깃배가 영산포 등대 밑에 출렁거렸다.  

▲ “콩볶아서 딸 줄라고.”
ⓒ 김창헌

“고깃배 들오믄 ‘선창에 조기 황석어 받으러 간다’고 동네마다 입소문이 나. 고깃배가 날짜 맞춰서 들오고 그러는 게 없어. 다 입소문으로 알제. 선창거리에 가서 배가 며칠 날 들어오요 물어보믄 선창가 사람들로 짐작으로 얼마 있으믄 들어오겄는디라 그 정도였제.”
강양광 할머니도 고깃배 들어오면 달라든 아낙네 가운데 하나였다. “태극기 달고 황실이배 갈치배 들오믄 여자들 문전성시 돼불어. 전라도 도부꾼들이 다 모였을 거여. 40리 50리에서 다 왔는게. 배에서 바로 못 사고 뭍으로 내려지면 우리가 달라들어 사제. 갈치 받아서 딴 사람하고 가르고 그놈 머리에 이고 영암으로 폴로 댕기고 했제. 마을마다 돌아 댕김시롱 돈이 귀할 땐게 곡물하고 많이 바꾸고. 갈치 하고 바꾼 보리쌀 서숙쌀을 영산포 와서 뱃사람들한테 넘겨주기도 하고. 뱃사람들 짐치(김치) 갖다주믄 환장을 했네. 뱃사람들이 영산포 짐치는 묵기 아까워서 밥 열 숟가락 뜨고 한나(하나) 집어 묵는다고 했어. 아까워서 못 묵고 놔뒀다가 신 짐치로 묵는다고 했어.”

배가 들오면 등짐꾼들이 지게로 고기를 뭍으로 날랐다. 총괄하는 한 사람이 있어 선주와 영산포 도매상인들과 거래를 텄다. 그런 후에 개인 상가로 나가고 도부꾼들에게 넘겨졌다.
이영호씨가 웃으며 하는 얘기가 있다. “꽁치 한 마리라도 뭍으로 올라온 것만 값을 쳐줬거든. 그러니까 지게꾼들이 (배에서 뭍으로) 판자 건너올 때 지게를 살짝 흔들어불어. 그러믄 고기가 강물로 떨어져불제. 떨어진 고기는 상인 것도 아니고 선주 것도 아녀. 주운 사람이 임자제. 홍어가 꼬비(꼽, 비늘 없는 생선의 점액질 액체)가 있어 미끄런게 홍어 나를 때 그 짓을 많이 했제. 선주가 앙거서 보고 있는디, 그 사람들도 그런갑다 하고 냅뒀어.”

최찬집 할아버지는 “그때는 농어 맛있는 줄 모르고 살았단게. 고기가 푸졌는게”라고 말한다. “아구는 고기로 쳐 주지도 않았어. 징그럽게 생겼다고 묵들 안해. (사람들이) 아구 묵은지 얼마 안 돼. 복쟁이도 시방은 비싼 고긴디 그때는 발로 톡 차고 댕겼제. 복쟁이가 뵈(성질) 나믄 배가 더 불룩해진디 그러믄 또 ‘이놈 봐라’ 하고 톡 차불고. 생선이 넘쳐났을 땐게 웬만한 고기는 눈에 안 보였제.”
젓배 얘기를 빼놓을 수 없다. 지금의 영산포장에서도 젓갈은 어물전과 맞먹을 정도로 위세를 부리고 있다. 한 젓갈 상인은 “예전 명성이 그대로 남아서 지금도 전국적으로 나가는 택배 물량이 적지 않다”고 말한다. 최찬집 할아버지는 “젓배가 들왔을 때가 질로 영산포가 번잡했다”고 말한다.
“젓배가 겁나 왔제. 그때 선창이 으쓱으쓱 해. 임자도 낙월도에서 많이 왔어. 멸치젓 황석어젓 밴댕이젓 잡젓. 김장철만 되믄 장사진이여. 젓갈 드럼통이 실(셀) 수 없을 정도로 있는 디(데)가 영산포였어. 영산포 사람들이 젓갈 담그기 선수제. 나주 근방 젓갈 장시들은 다 영산포 사람들이여.”

▲ “인자사 마수했어.”
ⓒ 김창헌

“영산포에 올라온 홍어는 나주 사람들이 다 소비했제”
홍어 숙성의 원조 영산포. 홍어 전문가 이영호씨는 들려줄 말이 많다. 흑산도에서 잡힌 홍어가 영산포까지 오는데  열흘에서 보름이 걸려 자연스럽게 삭힌 홍어를 먹었다는, 홍어의 유래는 기본.
“흑산도 사람들은 회로 묵으니까 삭힌 홍어 못 묵고 영산포 사람들이 삭힌 홍어 묵었다는 것은 다 아는 건게 말할 필요도 없고, 흑산도 근처에 있는 영산도 사람들이 공도(空島) 정책으로 배 타고 여기 와서 살아서 여그 지명이 영산포가 되고 영산강이라는 이름도 그 사람들 때문이라는 것도 책 읽어 보믄 다 나오고….”

이제 기본이 아닌, 부들부들한 홍어 얘기가 이어진다. “옛날 드라마 ‘대장금’에서 전라도 사람들이 홍어를 썩혀갖고 묵는다고 나온디 엄밀히 따지믄 전라도 사람들이 아니라 나주 사람들이여. 홍어배 들오고 했을 때 강진 영암 장흥 사람들이 홍어 먹을 줄 알았가니. 냄새난다고 안 먹었어. 영산포에 올라온 홍어는 나주 사람들이 다 소비했제. 나주가 아닌 딴 데로 고기 폴러 댕기는 다라이 장사들은 홍어를 안 갖고 댕겼제.”

“그때는 홍어가 비싸지 않았어. 지금 한 마리에 6만 원인디 한 바구니에 3천 원씩. 수치 두 마리는 무조건 암치 한 마리 값으로 쳐 주고. 잔칫상에 홍어가 올라간 것도 나주가 원조제. 나주 사람들은 소를 잡아도 잔치 안 했다고 해. 홍어가 올라가야 잔치했다고 하제. 나주 사람들은 젓가락이 먼저 홍어한테 가거든. 홍어 묵고 배탈났다는 사람 없어. 잔치 음식으로는 그만이제.”   
영산강 물길이 막히며 영산포의 영화는 과거가 됐지만 ‘홍어 1번지’의 명성은 계속 유지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 영산포에 가서 홍어를 사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오랜 동안 체득한 홍어 숙성의 노하우는 사라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산포 홍어 장사들 다홍색 내는 것은 문제도 아녀. 영산포에 홍어집 50여 개가 있는디 집집마다 다 달러. 내려온 내력이 있는 게. 노하우가 달러. 그 50집에서 숙성을 시킨 홍어가 전국으로 나가는 거제. 전국에 유통되는 홍어 70%가 나주 것이잖애.”

▲ 개장사는 꼭 물어본다. “얼치기요? 똥개요?”
ⓒ 김창헌

“상인들한테도 ‘영산포에서는 폴린다’는 그런 게 있어”
영산포장은 영산강의 교통·물자운송 수단으로 번성한 장이다. 기록으로 보면, 영산포장은 일제강점기 세워진 장이다. 향토지리연구소장 김경수(50)씨에 따르면 영산포는 영산강 유역 중에서도 일본인들이 특히 주목했던 곳. 1902년 이주해온 일본인들은 주로 미곡상인과 농업경영자들로 나주평야가 있고 수운의 편리함이 있는 영산포에 터를 잡고 ‘모또마찌’라는 시장을 만들고 일본인들이 상가를 확대해 나가며 인파와 말수레까지 붐비는 선창이 된다.

나주군지에는 영산강이 뱃길 구실을 제대로 하던 때의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목포와 영산포 사이의 뱃길에는 이틀에 한 차례씩 다니는 발동선 ‘영포환’이 있었다. 또한 쉰 척이 넘는 돛단배가 오르내렸다. 목포에서 오는 배는 생선 소금 건어물 식료품 잡화 건축재료를 영산포로 실어날랐고 영산포를 떠나는 배는 나주에서 생산된 쌀 잡곡 무명 가마니 등을 목포로 실어날랐다. 이처럼 영산포가 활기를 띠자 역을 중심으로 술집과 여관들이 들어서고 사람과 물산이 집중하여 영산포는 나주 지방의 실질적인 경제 중심지가 된다.

▲ “봄냄시 나네.”
ⓒ 김창헌

72년부터 영산강지구 농업종합개발사업이 시작돼 나주·담양·장성·광주 4개댐이 세워졌다. 2단계로 78∼81년 목포 동쪽에 길이 4.3㎞에 이르는 영산강 하구둑이 들어섰다. 영산포는 그로 인해 조수가 막힘으로써 77년 말 이후 사람이나 물자를 실어 나르는 일은 완전히 중단됐다. 번성하던 영산포 선창가는 쇠락하기 시작한다.

영산포장은 영산강 수로와 철도교통의 쇠퇴로 인해 물류의 집중이나 이동은 예전에 비해 훨씬 감소했지만 전남 서남부지역에서 나주와 광주로 올라가기 위한 여러 방면의 길들이 집중하는 교통의 요지로 여전히 그 영향력이 남아 있다. 40여 년간 어물전을 지켜온 김동천(73)씨는 “옛날 생각하믄 장사 못하제. 근디 옛날 힘도 커. 알아주는 장이었는게 지금도 알아줘. 영산포에 가야 좋은 물건 살 수 있다는 그런 게 남아 있으니까. 여가 깊은 내륙인디 오늘도 바닷가 사람이 차대기 펴놓고 모치(숭어 새끼) 문절이 폴고 있잖애. 상인들한테도 영산포에서는 폴린다는 그런 게 있어”

글·사진=김창헌 <자유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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