컨텐츠 바로가기


상품상세검색

검색

상세 검색

쇼핑 기획전

고객 상담 안내

  • 전화 : 070-7585-6280
  • 팩스 : 062-443-0788
  • 운영시간 : 전화: 070-7585-6280 팩스: 062-443-0788 운영시간 고객상담:평일09 ~ 18시 토요일 09 ~ 14시 입금계좌 농협 : 645818-51-020763 광주은행 : 122-107-306160 우체국 : 504035-01-001059 예금주 : (주)초록살림

운영일지

알뜰살뜰 쿠폰존


현재 위치

  1. 게시판
  2. 세상사는 풍경

세상사는 풍경

이것 저것 우리들 세상살아가는 모습들입니다.

놀라운 아버지와 어깃장난 아들
제목 놀라운 아버지와 어깃장난 아들
작성자 대표 관리자 (ip:)
  • 작성일 2008-12-29
  • 추천 추천 하기
  • 조회수 278
  • 평점 0점

 
‘놀라운 아버지’와 ‘어깃장난 아들’
아버지 조동환과 아들 조해준의 그림 대화는 계속된다
남신희 기자  

ⓒ 전라도닷컴

<사랑하는 내 아들들아 나는 오늘 일본으로 징용 간다. 내년에 너희 사형제를 다 불러들여 학교에 보내주마. 내년에는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좀 참아다오!>

호롱불 켜진 방 안. 윗목에는 길 떠날 보따리가 꾸려져 있고 아버지는 잠든 아이들의 얼굴을 쓰다듬고 있다. 뒷모습이지만 알 수 있다, 어머니는 눈물을 훔치고 있다는 것을.
1941년 어느 날 밤. 처음 시작은 그 장면이었다.

캘수록 기억은 무궁해지는 법인가. ‘내 인생의 한 장면’을 캐들어 가다 보니 이제 그것은 
무려 600장 가까이 이르렀다. 장면들의 퇴적. 한 인간의 생애 굽이굽이에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이 숨겨져 있는지 압도되고 만다.

2008광주비엔날레 전시작인 <놀라운 아버지>. 글과 그림은 조동환(73)씨가 그렸으되 기획과 설치는 아들 조해준(36)씨의 몫이었다. 해준씨는 평면에 그칠 수도 있었을 하나 하나의 장면들을 액자에 담아 책처럼 넘겨볼 수 있게 입체적으로 설치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전시장을 걸으면서, 책장을 넘기면서, 한 사람의 생애의 길을 함께 걷고 읽어내는 적극적 독자가 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연필 그림과 손글씨로 꼼꼼하게 복원한 지난 삶
<놀라운 아버지>를 보고 나면 이 아버지의 생애, 혹은 이 작업에 딱 들어붙는 말은 ‘놀라운’이란 말밖에 없다고, 순순히 동의하게 되고 만다.
일제 강점기와 해방, 6·25전쟁 등을 거친 세대로서 아버지의 삶에는 수수많은 곡절과 고난이 서려 있다. 평범한 한 개인의 생애가 역사와 어떻게 조우하고 관계 맺는지도 보인다.

아버지는 놀라운 기억력으로 그 생애의 장면들을 복원해내고 있다. 결정적 장면도 있고 소소한 장면들도 있다. 우리 삶은 그 모든 것들의 집합이라는 듯. 복원의 생생함을 거드는 것은 정밀하고도 유머러스한 그림과 글이다.

▲ 작가와 기획자로 새로운 관계맺음 속에서 함께 나눌 삶의 이야
기도, 함께 일궈갈 작업들도 많아진 아버지 조동혁씨와 아들 조해
준씨.
ⓒ 김태성 기자

놀라움은 또 있다. 이 작업은 서먹했던 아버지와 아들을 이어 주었다. 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던 교사 아버지와 그 기대를 채워주지 못하는 열등생이란 의식 속에 청소년기를 보낸 아들. 작업을 통해 두 사람은 서로를 재발견했다.

“야가 막내거든. 아들 딸 딸 아들을 낳았는데 막내아들에 대한 기대가 컸지. 내가 또 교육계에 있었으니깐 야가 학교도 들어가기 전부터 한글을 가르칠려고 무던히 애를 썼지. 때리기도 하고. 근데 신통치 안혀. 실망했지. 학교 들어가서도 미술만 잘하지 딴 것은 영 아니야. 원광대 미술과 들어가기 전까지 학창시절엔 맨나 혼나는 게 일이었지.”

“무섭고 엄한 아버지였죠. 너 학교서 그림 그린 것좀 내놔 봐라 그런 말이 대화의 전부랄까.”
‘말 없던’ 조용한 가족. 그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이 작업은 말을 싹틔워 주었다.

작가와 기획자로 새로운 관계맺음은 어떻게 시작됐을까. 설치미술가인 해준씨는 지난 2002년 새로운 작업을 구상하던 중 아버지가 물려주신 1927년 ‘제6회 프랑스현대미술전(동경/오사카)’ 도록을 어떤 경로로 아버지가 소유하게 됐으며, 또 아버지가 재직하던 중학교(익산 왕궁중)에 있는 ‘조각상’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지 문득 궁금해졌다. ‘생각하는 사람’을 닮은 그 조각상은 어린 시절 해준씨가 타고 놀고 오줌도 싼 기억이 깃든 조각상이었다.

조각상과 도록에 대해 여쭤 보느라 고향(전주)에 계신 아버지와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그 시절 이야기들을 듣다가 그는 아버지의 개인사를 작품으로 풀어내면 어떻겠냐고 제안하는 데 이른다.
아버지가 전직 미술교사였으니까 미술적 표현은 가능하겠다 싶었다. 그 중에서도 연필 드로잉작업이 된 이유는 이렇다.

“아이들이 처음 접하는 미술재료가 8절 스케치북과 4B연필 같은 것이잖아요. 가장 기본적이어서 친근하기도 하고 만만하기도 한 재료가 좋겠다 싶었어요.”

하지만 8절 스케치북과 4B연필이라니. 아버지는 망설였다. 유화 작업들을 해왔던 아버지에겐 ‘화가들이 보문 요것도 그림이라 하겠느냐’는 의구심이 들었던 것.
하지만 아버지는 결국 이 작업을 통해 딴 사람 딴 작업 흉내내기가 아닌 ‘자신만의 길’을 낼 수 있었다.

ⓒ 전라도닷컴

‘말 없던’ 아버지와 아들 사이에 작업은 말을 싹틔워 주고

소박하고도 진정성 있는 ‘수공(手工)’. 연필 그림과 손글씨는 그림일기를 보는 듯하다. 심리적 거리를 단박에 지우는 이무로움, 혹은 정다움.
어머니와 아들이 고랑 긴 밭에 쭈그리고 앉아 일하는 장면을 본다. 말풍선 같은 동그라미 안에는 또 하나의 그림이 담겨 있다. 산과 들엔 눈이 펄펄 날리는데 방에 앉아 문밖 풍경을 내다보며 고구마를 먹는 아들. 고단한 현실과 즐거운 상상이 겹치는 이 그림에 붙은 글은 이러하다.

<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1948년 경) 여름에 보리를 베고 나면 고구마를 심는데, 어머님의 소박한 희망의 말씀이 오늘 새삼스럽게 가슴에 와 닿는다. 고구마를 심으면서 어머니께서 “이 고구마를 가을에 캐서 방 웃목 구석에 수수대로 엮어 둥글게 만들어, 고구마를 담아놓고 눈오는 날 문구멍으로 눈 오는 것을 보면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고구마를 먹는 재미를 생각하면서 부지런히 심어보자”고 말씀하셨다.>

가난 속에서도 어머니는 그렇게 아들의 마음 속에 따뜻함을 심어 주었다.  
가장 먼저 떠올랐던 인생의 장면, 어린 4형제 머리맡에 앉아 이별을 치렀던 아버지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아버지는 1944년 봄 작업장에서 일본 감독관에게 머리를 구타당한 뒤 1년 이상 앓다가 일본에서 한많은 생을 마쳤다. 그의 나이 11살 때(1945년)였고 아버지 나이 36세 때였다. 사진 한 장 없이 가신 아버지도 어린 날의 기억을 더듬어 그려보았다.

일본 북해도의 조선인 탄광마을에서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의 ‘슬픈 귀향’을 담은 장면도 있다. 추운 겨울날 눈길을 하염없이 걸어가는 어린 자식들과 어머니. 아버지는 고향(정읍 소성면 화룡리) 떠난 지 4년 만에 한 줌의 재로 큰형의 품에 들리어 가고, 어머니는 막내여동생을 업고 머리에는 이불을 이고…. 1945년 11월 어느 날의 장면이다. 거지 신세가 되어 막막하니 귀향하는 길이기도 했다. 어머니가 왼쪽 바지 앞주머니에 넣고 바늘로 꿰맸던 돈을 고국 부산역에서 열차를 타다 몽땅 ‘쓰리’당했던 것. 잃어버린 거금 4200원은 일본에서 어머니가 병환중인 아버지를 대신해 떡을 만들어 팔아 모은 돈이었다. 

ⓒ 전라도닷컴

아버지의 생애와 손, 아들의 시선이 두루 비벼진 다큐 드로잉

그가 ‘나의 가장 암울했던 때’라고 말하는 시절은 노무자합숙소에서 살며 석탄 소금 져나르던 시절. 그는 1953년 중학교 졸업후 부산으로 건너가 고학을 해 부산사대 미술과를 졸업했다.
“노무자합숙소 살 적 고생은 말로 다 못혀. 비료푸대 속 종이를 쫘악 찢어서 거기에다 밥을 퍼주고 소금을 조금 주는 걸 묵고 살았어. 밥그릇도 반찬도 없이 그런 밥을 묵고 살았는디 그것도 세 끄니를 다 못묵었어. 일은 또 오죽 된가. 웬만하문 못 견뎌.”

그래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건 아버지의 긍지로 남아 있다.
“아버지, 그 밥 이야기는 첨 들었네요”라는 아들의 말에 아버지 대답은 “그것은 너무 추접시러워서 안 그렸어.”
아버지에게서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면 바로 수첩에 기록하는 게 버릇이 된 아들은 그 이야기를 수첩에 옮겨 적는다.

“아들하고니까 별별 이야기가 다 나오지. 다른 작가선생이 와서 말하라 했으문 요런 이야기들이 안 나왔을 거야. ‘못난 일’들은 묻고 싶었는디 아들이 고것들도 그리라 하대.”
‘못난 일’들도 그림 속에 들어와 아버지의 생애사는 공감과 친밀함을 더하고 있다. 그렇게 아들은 아버지의 기억을 끌어내고 듣고 정리하는 역할을 한다. 아버지의 생애와 손, 아들의 시선이 두루 비벼진 작품인 것이다.

아버지의 그림들 중 아들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아버지가 서울 한강을 도강하는 대목.
“1952년 중3 겨울방학 때 친구랑 고등학교 진학을 고학으로 해보기로 하고 모험을 시작했지. 휴가 끝나고 귀대하는 군인의 도움으로 한강을 건넜어.”

당시 일반인은 도강증이 있어야 도강이 가능했다.
“가난한 어린 소년의 모험정신이랄까, 아버지의 또다른 모습을 발견한 기분이었어요. 학교와 집만 오가던 아버지, 사회생활에 소극적으로 보였던 아버지에게 이런 면이 있었나 하는.” 아들에게 그 장면은 한 인간 속에 깃든 다면성, 혹은 가족이면서도 알지 못했던 비밀을 마주한 기분으로 다가왔다.

ⓒ 전라도닷컴

집요한 기록의지가 낳은 독특한 표현들 매력적

<놀라운 아버지>의 매력은 아버지의 유머감각에도 있다.
<1949년 고향동네 아저씨 아들이 이웃집 앞을 지나가는데 바라지(부엌 출입문) 굉이(나무옹이) 빠진 구멍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므로 궁금해서 그 구멍으로 부엌을 쳐다보니 닭에 옻나무를 넣어 칠계(옻닭)를 삶아서 약으로 쓰려고 삶는 중이었다. 그런데 이튿날 아저씨 아들은 오른쪽 눈만 옻이 올라 만나는 사람마다 웃으면서 물어 보더란다.>

그림 속에서, 내다본 그 구멍 만큼 한쪽 눈에만 옻이 오른 얼굴을 보면 딱하고도 웃음 난다.
점잖으신 할아버지의 ‘굴욕’ 사건도 있다. <우리 마을에서 가장 점잖은 지관 할아버지 댁에 불이 났었는데 불을 다 끄고 처마 밑에 앉아 담배를 피우시는데 “할아버지 바지가 이상한데요!” 하고 친구가 이야기하니까 할아버지께서는 “아! 망신이로고! 불이 나는 바람에 할망구 고쟁이를 입고 나왔구만!”…> 

개인사에만 그치지 않고 <놀라운 아버지>는 예전의 사람살이와 풍속, 다양한 사람들의 일화도 껴안고 있다. 독특한 표현방식의 그림이 이야기의 재미를 더한다. 건물의 안팎을 동시에 그려내는 투명효과 표현도 그 중 하나. 이야기 속의 이야기처럼 한 장면 안에 또다른 설명이나 상상, 곁가지 이야기가 필요할 때 즐겨쓰는 것은 말풍선 같은 동그라미. 집요하고 치밀한 기록 의지가 낳은 표현들일 것이다.

ⓒ 전라도닷컴

“아버지가 살았던 그 시대와 아버지를 다시 바라보게 됐죠.”

다큐멘터리 드로잉, 개인사와 관련된 글과 그림이라는 장르를 함께 일궈가고 있는 아버지와 아들. 공동작업을 시작한 해인 2002년 ‘신세대 흐름전’(마로니에 미술관)을 첫전시로, 2003년 ‘생각하며 일합시다’(광주 신세계갤러리), 2005년 ‘The Battle of Vision’(독일 담슈타트 쿤스트할레), 2006년 ‘젊은 모색전’(국립현대미술관) 등을 치러왔다.

이번 광주비엔날레 전시와 때를 같이해 아버지의 작품들은 책으로도 출간됐다. 《놀라운 아버지 1937∼1974》(새만화책).

자신의 개인사로 시작한 아버지의 작업은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10여 년 전 갑작스런 사고로 숨진 사촌형 조일환(그는 성공회대 조희연 교수의 아버지이다)씨의 유서를 바탕으로 그 일대기와 자식들 인터뷰 내용 등을 그림으로 담아낸 것. 이 작업은 ‘조씨 연대기, 조동환&조해준 전’(2008, 대안공간 풀)과 《뜻밖의 개인사》(새만화책)란 책으로 묶여졌다.

일련의 작업들을 해내며 아버지는 많은 변화를 겪었다. “세상 온갖 이야기를 허투루 듣지 않게 돼. 사람들하고도 적극적으로 대화하게 되고…. 인자 나이 묵어서 쉴 판인디, 야 때문에 발동이 새로 걸렸어. 그림 그리는 일에도 사는 일에도….”

아들도 마찬가지. “아들이란 존재인 내가 몰랐던 아버지의 삶을 비로소 만나게 됐고 아버지가 살았던 그 시대를 다시 바라보게 됐죠. 아버지의 삶에 대해 관심을 가진다는 것은 내가 할 수 있는 우리 부모 세대와 조상들의 삶에 대한 경외의 한 표현일 것 같아요.”
아버지의 삶 속에 시대상황에 대한 적극적 저항이나 비판적 성찰은 쉽게 드러나지 않지만 아들은 그 역시 평범한 소시민의 한 모습으로 받아들인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말을 틔워 주었던 이야기거리 중의 하나인 ‘생각하는 사람’을 닮은 조각상은 아버지가 70년대 초반 익산 왕궁중학교에 근무할 때 만든 작품. 제목은 ‘생각하며 일합시다’이다. “정부 주도로 새마을운동, 조국근대화, 경제발전 등이 외쳐지고 몰아붙여지던 때잖아요. 무조건 초가집은 없애야 하고 마을길은 넓혀야 하고. 생각 없이 이뤄지는 모든 일들에 대해 아버지 나름의 비판의식이 스며든 작품이지 않을까 싶어요.”

‘놀라운 아버지’에 화답해 아들은 ‘어깃장난 아들’ 작업중
세대 간의 이야기는 쌍방향으로 이뤄져야 할 것. ‘놀라운 아버지’에 대한 화답으로 아들의 작업도 이어진다. 제목은 ‘어깃장난 아들-1979년부터 1990년까지’.
“우리 둘이 대화가 없이 살던 그 때 너는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는 아버지의 뒤늦은 궁금증과 질문에 아들이 자신의 초·중·고 학창시절을 이야기하는 형식이다. 어디서 무엇을 했느냐에 아버지는 ‘공부는 안하고’란 말을 괄호쳐 넣고 싶다며 껄껄 웃는다.

아들이 그리고 쓰는 데 그치지 않고 아버지의 코멘트가 거기에 더해질 참이다. 이른바 코멘터리 드로잉. 다큐드로잉에 또 한 겹의 입체적 재미를 더하는 작업이다. 그림 안에서도 부자의 대화는 계속된다. 서로에게 누락된 삶의 조각과 기억들이 그렇게 하나둘 채워져 간다.

이들 부자를 부러움의 눈으로 바라보는 동안 문득 ‘내 인생의 장면들’을 꼽아보게 되고 ‘내 어머니의 지난 삶’도 새삼 궁금해진다. 나, 그리고 부모 세대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힘. 이들의 작업이 사적 의미를 뛰어넘는 이유다.


"전라도의 힘 전라도닷컴을 지켜주세요" >> 전라도닷컴 후원 신청하기 <<

기사출력  2008-11-05 14:49:07  
ⓒ 전라도닷컴  
첨부파일 33_03313_4.jpg
비밀번호 삭제하려면 비밀번호를 입력하세요.

목록

삭제 수정 답변

댓글 수정

비밀번호

수정 취소

/ byte

댓글 입력

이름 비밀번호 관리자답변보기

확인

/ byte


* 왼쪽의 문자를 공백없이 입력하세요.(대소문자구분)

에게만 댓글 작성 권한이 있습니다.


Meow Ard Designer

장바구니 0

TOP